신의 선물인가 인류의 재앙인가, 에어컨에 대한 ‘알쓸신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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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그는 기후위기 이슈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에어컨이 전기를 많이 소모하고, 에어컨 냉매가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것도 알고 있다. 죄책감이 들 때도 있지만, 그에게 더위와의 싸움은 이미 생존의 문제다. 몸과 마음이 지치는 여름철이 되면 망설임 없이 에어컨 리모컨 버튼을 누른다. 이것이 김씨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일수록 에어컨 없는 여름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식당과 마트부터 엘리베이터와 공중화장실까지,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 실내를 찾기 어렵다. 에어컨을 튼 채 문을 활짝 열고 영업하는 ‘개문 냉방’을 자제하자는 캠페인이 계속되지만 서울 명동 등 주요 번화가의 상점은 여전히 찬 바람을 밖으로 내보내며 손님을 유혹한다.
과거 에어컨은 부의 상징이었다. 한국갤럽의 연례조사에 따르면 국내 가구당 에어컨 보유율은 1993년만 해도 6%에 불과했지만, 역대급 폭염이 닥친 1994년 이후 늘기 시작했다. 1998년 24%, 2001년 36%로 증가하다가 2012년 74%, 2018년에 87%로 늘었다.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보유율이 무려 98%에 달한다. 에어컨은 이제 밥솥이나 냉장고 같은 ‘생활필수품’의 지위에 올랐다.
한국의 에어컨 보급률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다. 미국, 일본과 함께 에어컨이 많이 설치된 나라 ‘톱 3’에 꼽힌다. 2018년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 상위 3개국은 일본(91%), 미국(90%), 한국(86%) 순이다. 사우디아라비아(63%)나 중국(60%)보다 훨씬 높다. 유럽은 10%, 인도는 5%였다. IEA는 일평균 기온 25℃ 이상인 지역에 사는 인구는 28억명인데, 이 중 에어컨을 소유한 가구는 8%뿐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 자료는 6년 전 것이므로 그동안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여름철에 크게 무덥지 않아 에어컨 보급률이 낮았던 유럽에서는 최근 10여 년 사이 폭염이 닥치면서 에어컨 보급률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에어컨 감사의 날(Air Conditioning Appreciation Day)’이라고 있다. 매년 7월3일이다. 1902년 7월 미국의 기술자 윌리스 캐리어가 에어컨을 발명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어떤 이들은 더위를 물리치게 해준 에어컨을 두고 ‘신의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에어컨은 사실 인간을 위한 발명품이 아니었다. 캐리어는 여름철 인쇄 공장에 습기가 많아 종이가 쭈글쭈글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에어컨을 만들어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에어컨 도입 이후 미국 노동자의 일상은 달라졌다. 과거에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날이면 노동자들은 일찍 퇴근했고, 상점과 극장도 일찍 문을 닫았다. 여름철 도심은 텅텅 비곤 했다. 날씨가 노동을 통제했다. 에어컨이 등장한 이후 기술이 노동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미국 최초로 현대식 에어컨을 설치한 곳은 땀 흘리는 블루칼라 노동자의 일터가 아니라 뉴욕 증권거래소였다. 당시에도 화이트칼라 노동은 컴퓨터 칩과 같아서 온도가 낮을수록 더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으리라는 인식이 있었다.
1930년대부터 미국 기업가들은 “에어컨이 경제성장을 자극하고 대공황을 끝낼 강력한 힘”이라고 말했다. 에어컨을 생산하는 제조업 일자리가 늘어날 뿐 아니라 낮이 긴 여름에 남아도는 전등 전력 잉여분을 에어컨이 소모할 수 있으므로 발전업체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미국 연방정부 전시생산국은 ‘개인적 쾌적함’만을 누리기 위한 에어컨 생산 및 설치를 금지하기도 했다. 도시 상점에 설치된 에어컨을 군수물자 공장으로 이전해 전쟁장비 생산 환경을 쾌적하게 하는 데 활용했다(스탠 콕스, 〈여름전쟁〉).
에어컨의 보급은 미국의 인구지도도 바꿔놓았다. 플로리다주는 캘리포니아, 텍사스에 이어 미국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2023년 기준 2261만명). 뉴욕주(4위)보다 인구가 많다. 지금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별장(마러라고 리조트)이 있는 아름다운 휴양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플로리다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여름철의 극심한 무더위와 모기 때문이다.
플로리다의 인구를 증가시킨 것은 에어컨이었다. 1960년대 이후 에어컨을 구매할 여력이 있는 이들이 플로리다로 모여들었다. 일부 부유층은 겨울철에만 휴양지로 이용하기 위해 플로리다에 별장을 지었다. 그들은 별장을 사용하지 않는 여름철에도 높은 습도로 자동차와 전자제품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에어컨을 틀어놓곤 했다.
2006년 에어컨 이용이 과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플로리다 지역 언론이 ‘에어컨 없는 집 세 가구’를 찾아내 기사를 써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중 한 명은 인터뷰를 통해 “에어컨이 없다면 플로리다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같은 해 〈뉴욕타임스〉는 맨해튼에 있는 여러 매장의 온도를 일일이 측정해 고급 상점일수록 에어컨을 더 세게 튼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업계 관계자는 기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고급 에어컨 설비는 지위를 상징한다.”
에어컨이 무더위를 물리치고 노동환경을 쾌적하게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다. 여름철에 창문을 닫고 생활함으로써 모기 등 해충의 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점도 있다. 그런데 건강 측면에서 보면 에어컨 자체가 질병의 온상이 될 염려가 있다. 대표적인 질병이 레지오넬라균 감염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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